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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은 친일파였습니다.

by No.Fibber 2022. 9. 19.

목차

     

    김 두 한 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무엇일까?
    그래 역시 장군의 아들 일 것이다. 1990년 6월 9일 개봉된 임권택 감독의 동명의 영화 '장군의 아들'은
    당시 한국 방화 도서는 기록적인 관객 동원을 하며 장안의 화제 가 되어  김두한이라는 이름 석자를

    대중의 머릿속에 깊이 아로새겼다.

    위에 있는 내용은 네이버에서 발췌한 김두한의 인물 정보이다.(지금은 수정되었다.)
    직업이 독립운동가? 글쎄 그의 아버지인 김좌진 장군께서 마지막까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치신

    훌륭한 독립운동가인 건 잘 알겠지만, 김두한도 독립운동가? 혹시 종로에서 주먹패의 우두머리를 하던 시절

    반대파인 일본 야쿠자 하야시와 대립했었던 이력 때문에 그 의 직업을 독립 운동가라 한 것일까?
    MBC에서 방영된 깡패와 건달로 본 100년이란 다큐멘터리를 보고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여

    이 친일파 김두한이라는 글을 작성했다. 자 그럼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김두한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이던가.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친자이며, 약관 18세의 나이로 종로 주먹계의

    우두머리로 등장한 타고난 싸움꾼이다. 당시 종로 번화가에 자리를 트고 있던 일본 야쿠자 패거리인 하야시 패로부터

    우리나라 상인들을 보호해준 의리 있고 의협심 많은 협객이었고, 한국 전쟁 이후 활발한 우익 청년활동으로

    잔재해 있는 공산당들을 소거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인생 말년 에는 주먹패 시절 자신의 본거지였던 종로를 지역구로

    국회의원에 당선 66년 국회 오물투척 사건으로 사퇴 72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참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저 굴곡많은 인생 중에 일반인이 기억하는 김두한은 한국전쟁 이후 소위'정치깡패"라 불리우던우익 청년활동 시절과

    국회의원 시절의 활동이 10이라 한다면, 어린 나이에 폭력 조직에 가담하여 종로 주먹계를 평정하고,

    대한민국 조직 폭력배의 근간이 되는 1세대 주먹계의 황제로서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나라 상인들을 일본 야쿠자의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해 줬다던 의협심 많은 협객으로서의 영웅담 화가 90이다.

    그렇다면 그 대단한 의인 김두한의 희생양이 되었던 일본 야쿠자 하야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두한과 대립관계에 놓인 일본 야쿠자의 두목으로써 그가 영웅화되는 데에 일조했던 

    하야시라는 인물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 본다.

     

     

    그렇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신현준 그리고 드라마 '야인시대'에서의 이창훈.
    각각 개성 강한 일본 야쿠자 보스의 캐릭터들을 훌륭하게 소화 해준덕에 우리나라 사람들 에겐 지독히도

    김두한을 괴롭혔던 악질 일본인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한국인? 그래 그는 한국인이다.

    그가 한국인이고 삼촌을 따라 일본에 가서 야쿠자가 됐다는 거 까지야 그렇다고 치자. 근데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서울의 가장 중심 근거지인 종로 야쿠자의 보스로 앉아 있을 수 있는 것 일까? 타고난 싸움꾼보다는 지략과 조직의

    정비에 능했던 하야시(선우 영빈)는어려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자라며 생활하던 중, 그의 기민함과 영리함이

    당시 일본 최고의 거물 정치가이자 일본 골수우익의 시조였던 두산만(頭山滿 도호 야마 미쓰루)의 눈에 띄어

    그가 정치적 목적으로거느리던 사설 폭력조직에 편입된 것이다.  

     

    그렇다면 두산만(頭山滿 도호 야마 미쓰루)은 또 어떤 인물인가?

     

     

    한국과 중국에도 역사에 남을 혁명가들이 있었다.
    바로 한국에는 김옥균 중국에는 장개석과 손문이 그들이다. 세 사람 모두 마지막까지혁명과 개혁을 외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두산만(頭山滿 도호 야마 미쓰루)은 무사 집안 출신의 사람으로 여러 주먹패들을 거느리며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거물 정치가였다. 대 동아시아주의를 표방한 대륙 침공의 선봉자였으며,

    일본 군국주의를 지향하는 현 일본 내 골수 우익 집단의 시조이다.

    한국에 자행했던 대표적인 침략 사례는 민비 시해 사건의 사주였다. 그런 그가 거액의 정치자금을 지원함으로써

    활동을 독려했던 사람이 김옥균, 손문, 장개석이었다.

    김옥균이 개혁을 외치는 중에 일본의 세력을 빌렸다는 말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일본의 세력이 두산만이었던 것이다.
    만약 두산만의 세력을 등에 업은 김옥균과 손문, 장개석의 혁명이 각각 성공하여 두산만의 대륙 침공 전략과맞물렸더라면

    한국과 중국의 현대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일제 치하 시절 두산만은 대륙 침공의 일환으로 서울의 중심부 종로에 한 무리의 주먹패를 파견한다.
    그 주먹패의 우두머리가 하야시다. 여관업과 유흥업을 중심으로 이권을 챙기던 하야시는  실제 대한민국 영세상인들 에게는
    금품을 갈취를 하지 않았다. 하야시 패는 현재의 폭력조직과 유사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이권 창출이 가능한 잘 갖추어진 현대식 폭력조직이었고, 종로 본정(혼마찌) 일본인 거리에 있는 일본 유흥 주점으로부터 상납을 받았다.

    한국인 상인들로부터 보호의 명목으로 상납을 받았던 주먹패 들은 김두한 이전의 한국 건달들과 김두한 그 자신이었다.

    김두한이 한국인 상인들에게 베풀었던 아량이라는 건 영세한 야시장 상인들에게 상납을 받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중요한 건 그 김두한이 자신의 패거리에좀 더 나은 이권과 좀더 강한 권력을 위해 하야시 패와의  마지막 전쟁이었던

    장충단 싸움을 끝으로 하야시와 김두한은 호형호제하는 의형제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김두한은 하야시를 둘도 없는 형님으로 모시는 대가로 막대한 수익을 내주는 자전거 대여업 운영권과

    한 달에 1000원(현 1000만 원 정도)의 활동비를 지원받는다. 하지만 김두한이 얻은 가장 큰 힘은 돈 보다도 하야시라는

    엄청난 권력이었다. 단순한 주먹 패들끼리의 휴전 협정 같은 걸로 보기엔 뭔가 좀 어색하다. 대한 제일 독립 운동가라고

    추켜세우며 김좌진 장군의 아들임을 공공연히 내세웠던 그가 일본 최고의 군국주의 대륙침략 선봉장 두산만의 첨병이었던

    하야시를 친 형님처럼 모신다는 것. 그 대가는 태평양 전쟁 발발 후 그는 물론 그의 부하들 그리고 그가 거느리던 기생들이

    단 한 명도 정신대 또는 징집병으로 끌려가지 않았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그리고 김두한 자신도 하야시를 등에 업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일본 경무청에 불려 간 일이 없다는 사실.

    김두한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권력과 타협하고 협력하여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챙긴 전형적인 친일파 중 한 사람이다.
    태평양 전쟁 말엽 김두한은 일본 경무청의 제의로 하나의 단체를 만든다. 이름하여 반도의 용정 신대.
    후일 여러 개의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일본 전쟁의 후원이 되는 민간단체의 시초다.

     

    이단체가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아는가? 한반도의 청년들이 스스로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후방에서 정신적으로나마 응원하고
    지원하겠다는 얘기다. 김두한은 태평양 전쟁 당시 자신들의 부하들이 강제징용되는 것 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쟁터로 내몰리는 걸 애써 외면했다. 그가 마지막에 더 이상 버티기 힘들 때 자신과 자신들의 부하가 전쟁터로 나가지 않기 위해 쓴 방법이  정신적으로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지원한다는 반도의 용정 신대의 발족이다.

     

    물론 고민은 했다 한다. 근데 뭘 고민한 걸까. 고민을 했다는 것 자체도 좀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저것이라는 건 더 웃긴다.  전원 앉은자리에서 혀 깨물고 자살까지는 못 하더라도,

    자발적인 전쟁 지원 청년단체 발족은 웃기는 거 아닌가?치열한 자신의 구역을 지켜내기 위한 상대방이 한때나마

    야쿠자이었단 사실. 그리고 난세 중 난세에 국민들을 뭔가 하나로 뭉칠 수 있게 하기 위해 필요했던 영웅 한 명,
    그것 때문에 김두한이란 인물이 탄생한 걸까?


    친일 명단에 등재한 여러 사람과 비교해 봐도 다분히 친일파로 등재되고도 남았을 김두한의 여러 행실을 두고도
    그가 그렇게 반일 영웅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가 친일로 몰리면 위대한 독립 운동가였던

    김좌진 장군마저 평가절하되는 걸 막고자 함이었을까?사실 한국 전쟁 이후의 그의 행적을 쫓아 보아도

    그는 항상 권력의 힘을 따라다녔던 깡패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어쩌면 그는 친일파가 아니다.

     

    그는 친일파가 아니기 때문에 친일파로 등재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에 와서 뭔 말이냐고?
    김두한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지금의 폭력배들과 똑같은 단순 무식한 깡패일 뿐이다.

    자기가 하는 일이 친일인지 반일인지 또 그가 정치깡패 시절 했던 우익활동이 우익인지 좌익인지

    우익이 뭔지 좌익이 뭔지도 모른 체 그냥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마약과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무식하게도 단순한

    돌 대가리 깡패였을 뿐이다. 그래 이제 와서 그를 친일파 일본의 압잡이로 내몰아서 무슨 득이 있을까.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끌어내려 흠집낼 필요도 없듯이 무슨 만화 그리듯 영웅화하여 거짓 일색으로

    역사를 뒤집어엎는 행동도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한때는 한 명의 협객으로서 일본 야쿠자들을 때려잡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희열을 느꼈었는데

    이제 와선 그릇된 영웅 만들기를 했던 흥미위주의 영화와 소설 드라마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에 대한 진실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지도 않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김좌진 장군이 정말 김두한 씨의 아버지가 맞다면 김두한 씨는 지금쯤 하늘에서 뒤지게 얻어맞고 있을 거다.

     

    하긴 그러기 전에 증명부터 제대로 해야 할 듯싶다. 요즘 참 말 많든데, 김두한이 정말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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